서성원 기자 / tkdssw@naver.com
1. 태권도, 무도에서 스포츠로 영역 확장
1960년대 초 태권도 대중화와 저변확대를 위해 획기적인 정책이 추진됐다. 바로 태권도의 영역을 무도에서 스포츠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양진방은 “태권도의 발달과정에서 가장 큰 변화는 무술에서 경기로의 전환이다. 태권도 경기화는 엄운규·이종우·이남석 등 2세대들이 (자신들이 터득한) 기술을 경기에 적응시키고 발전시켜 경기 태권의 기술체계를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1)며 의미를 부여했다.
1960년대 초까지 각 관(館)은 대부분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고 태권도 기본동작과 기술을 응용한 공방(攻防) 개념의 ‘대련(對鍊)’을 했다. ‘대련(對鍊)’은 일본에서 건너온 무도 용어로, 스포츠 겨루기와는 그 의미와 개념이 다르다. 당시 각 도장에서 행했던 일보대련(一步對鍊), 이보대련(二步대련), 삼보대련(三步대련)은 그동안 익힌 동작과 기술을 응용해 실제로 움직이는 것을 전제로 공격과 방어를 반복하는 무도적 특성의 수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태권도 경기화는 순탄하지 않았다. 태권도가 무도적 특성에서 스포츠로 영역을 확장하자 찬반 논쟁이 치열했다. 태권도 경기화를 반대한 사람은 황기와 최홍희가 대표적이다. 최홍희는 “태권도의 경기화는 태권도 기술의 3대 요소인 형(型), 대련(對鍊), 격파(擊破) 중에서 대련만으로 승부를 결정하게 됨으로 불합리하다. (따라서) 시합을 할 때 착용하는 호구가 기술을 완전히 발휘하게 할 수 없을 것”(2)이라고 말했다.
황기는 태권도를 무술로 규정하고 “무술이란 원래 인간의 생명을 직접적인 대련으로 하는 것이므로 시합이 불가능하다. 기술이 그 형태나 방법에서 근본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므로 경기화는 신중하게 고려돼야 한다. 경기화는 결과적으로 무도정신을 무시하게 되고, 단(段)·급(級)의 심사제도가 불필요하게 된다”(3)며 태권도 경기화를 반대했다.
이에 대해 홍정표는 “무도적인 견지에서 (황기와 최홍희 등이) 태권도 경기화를 못마땅하게 여긴 건 사실이었지만 이종우와 엄운규 등은 태권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스포츠로 전환해야 한다며 각 유파별로 제각각이었 경기규칙을 제정하는 데 열성적이었다”(4)고 말했다.
1961년 9월에 열린 제1차 대한태수도협회(大韓跆手道協會, 대한태권도협회 전신) 이사회에서 9표와 5표를 얻어 부회장에 선출된 이종우와 엄운규는 태권도 경기화를 적극 추진했다. 엄운규는 태권도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선 스포츠화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태권도가 대한체육회에 가입하면 1년에 한 번식 개최되는 전국체육대회에 참가할 수 있어 태권도 인구의 저변 확대를 빠르게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5)
당시 국가재전최고회의 부의장(이주일 장군)은 태권도 단체가 통합을 하면 대한체육회에 가입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대한체육회는 태권도는 무술이지 스포츠가 아니라며 가입을 반대했다.
따라서 1960년대 초 태권도 경기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합리적인 경기규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스포츠의 규칙에 공통적인 성격인 경쟁 조건의 공정성 확보, 안전성 보장, 경기운영의 효율화, 흥미의 제고 등 무술의 성격과 조화시키는 것이 곧 경기규칙 제정의 과정이었다. 이때 무술이 갖는 기술의 다양한 요소들이 일부 제한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된다. 즉, 격투의 기술이라는 성격은 줄어들고 규칙에 따라 스포츠로서 우수성이 증명될 수 있도록 재조직하는 것이다.(6)
허건식(무예연구가)은 태권도를 비롯한 무도가 스포츠로 영역을 확장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현대 무도가 스포츠화하면서 무도 본질은 상실한 채 경기적 요소만 강조하고 경기규칙이 수없이 변천하면서 기술적 본질이 상실되었다. 이것은 경기화가 된 무도가 서구의 기능주의적 성격으로 변하고 있는데서 찾을 수 있다. 서구 스포츠의 기능주의는 무도의 특징인 수양적 개념의 목표에 반대되는 경향을 보인다. 태권도의 경우 경기적 성격이 강해지면서 스포츠 문화가 안고 있는 지나친 경쟁심과 승부의 집착이 늘어났다. 하지만 무도의 경기화는 문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지된 기술적 개념을 넘어서 규정된 틀 속에서 새로운 기술체계와 수련방법이 자유롭게 발전하는 과정을 만들기도 했다. 태권도는 새로운 겨루기 중심으로 전환한 결과 일본 가라테와 같은 형 중심의 허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7)
이런 가운데, 태권도 경기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관(館)이 지도관이었다는 것은 가라테 슈토간(修道館) 계열의 한무관(韓武館) 관장을 지낸 윤쾌병과 결코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박성진(태권도 전문기자)의 주장을 보자.
“한무관의 특징은 보호구(防具)를 가라테 경기에 본격적으로 도입했다는 점이다. 검도 호구에서 착안해 보호구를 가라테 경기에 착용한다는 생각은 한무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경기화를 실현해 보호구 가라테의 실질적인 발상지로 여겨지는 곳이 바로 한무관이다. 태권도 경기화의 뿌리에는 호구를 도입하고 가라테를 경기화하고자 했던 윤쾌병의 한무관이 있다. (세미-컨텍 스타일 보호장비) 호구를 통한 경기화의 성공의 뿌리에는 도야마 간켄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윤쾌병의 한무관이 있었고, 한국에서 경기화를 주도했던 것도 윤쾌병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지도관이었다는 점은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사실이다.”(8)
이 같은 주장은 타당성이 있지만 좀 더 면밀한 검토와 탐구가 필요하다. 태권도 경기화를 주도한 곳은 지도관이 맞지만, 그것이 지도관 중앙본관이 있던 서울이 아니라 전북 전주에 기반을 두고 있던 지도관이 선도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윤쾌병의 영향보다는 조선연무관 권법부 초창기 수련생이었던 전일섭(조선연무관 권법부 개관자 전상섭 친동생)과 유병용의 영향을 더 받았다. 따라서 그들이 가라테 경기화에 우호적이었던 윤쾌병과 어떤 관계였는지를 먼저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한편 한경희는 1962년 전후부터 1972년 개정 전까지를 태권도 경기규칙 제정기, 1972년부터 1990년까지를 경기규칙 정착기, 1990년부터 2009년까지는 경기규칙 발전기로 설정하고 변인 요인(9)을 고찰했다.
이에 비해 한창효는 경기규칙 변천과정(10)을 4단계로 구분해, 제1기는 광복 이후부터 1962년 이전까지를 경기규칙 제정 이전기로 보고, 제2기는 1962년 경기규칙이 제정된 시기에서 1972년 세계태권도연맹 결정 이전으로 봤다.
2. 태권도 경기화 추진 과정
(1)경기규칙 개정 전후의 상황
1960년대 초 태권도 경기는 주로 지도관 중앙본관이 있던 한국체육관과 국민회당, 서울운동장 등에 설치한 마룻바닥과 땅바닥에서 행해졌다. 각 관(館)에서 했던 대련은 스포츠보다 연마와 수련에 가까웠기 때문에 통일된 규칙이 없었다.
1962년 대한태수도협회가 경기규칙을 제정하기 이전에 대련은 주로 상대의 신체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목표 부위에 기술이 닿기 직전에 멈추는 이른바 ‘촌지방식(寸止方式)’으로 행해졌다.
1960년대 초 한국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했던 이승완은 “50년대 초·중반까지는 대부분 촌지방식으로 대련을 했다. 도장에서 그렇게 가르쳤다. 상대방 급소 앞에서 멈추면서 ‘이뽄’하고 소리치면 그것이 끝나는 것이다”(11)고 말했다. 가라테의 영향 때문이다.
촌지방식의 경기는 195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직접 타격의 기술적 형태가 나타나게 된다.(12) 가라테는 무도적인 측면을 중시하여 촌지방식을 고수했지만 직접 타격을 하지 않으면 어느 것이 유효 득점인지 불분명한데다 심판의 주관적인 판정이 많이 작용해 스포츠로 발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가라테의 기술 체계를 답습하고 있던 당시 경기방식은 각 관의 풍조에 따라 달랐다. 태권도 경기화에 앞장선 지도관은 지관별도 대회를 하면서 직접 타격으로 전환했지만 청도관과 송무관은 끊어 쳤다. 송무관 출신의 강원식 증언을 보자.
“송무관 창설자인 노병직과 청도관 창설자인 이원국은 송도관(松濤館)의 후나고시로부터 (가라테를) 전수받았다. 그래서 당시 청도관, 송무관의 경기방식이 비슷하다고 하지만 지도관의 전상섭씨는 송도관에서 전수를 받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시합방식이 다르지. 무덕관(황기 관장은) 중국에서 배웠다고 하셨다고, 그래서 경기의 흐름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13)
1962년 11월 경기규칙 제정 이전에는 무도적 성격이 강해 연령과 체중과 체급에 관계없이 경기가 이루어졌고, 경기형태는 1회전 단판이었다. 경기 전개는 1본 대련, 3본 대련, 자유대련, 단체전 승발전으로 행해졌다. 승발전에는 쉬는 시간이 없었다.(14)
승발전은 주로 지도관에서 했는데, 각 시도 대표 선수들이 5명씩 나와서 체중과 상관없이 경기를 했다. 한 선수가 실력이 출중하면 상대편 5명과 연이어 대결할 수 있었다. 1962년 경기규칙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주로‘내치기’, ‘메치기’,‘아시바’로 불리던 잡아 넘기기, 걸어 넘기기와 같은 기술들이 사용되었는데, ‘아시바’는 일본 유도 용어 중 ‘이시바라이’의 줄임말로 판단된다.(15)
(2)경기규칙 제정 후 주요 대회
대한태수도협회(大韓跆手道協會)는 1962년 11월 3일 경기규칙을 제정했다. 그 후 대한체육회에 가입해 1963년 2월 23일 대한체육회 정기대의원총회에서 정식 경기단체로 승인되면서 태권도 경기화는 급물살을 탔다. 경기규칙의 정규화(正規化)는 그동안 관별로 시행해 오던 경기방식을 일정화했으며, 태권도 스포츠 경기화의 출발을 의미한다.(16) 1962년 제정한 경기규칙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기장 : 8mx8m 정방형 마룻바닥
-경기 복장 : 호구 또는 도복만 착용(호구착용 경기와 비호구 착용경기도 가능)
-경기 시간 : 1분 30초 2회전, 중간휴식 30초
-부별 구분 : 초기부 3급∼초단, 중기부 2∼3단, 고기부 4∼5단
-경기 종류 : 개인전, 단체전(체급 구분없이 5인제)
-경기방식 종류 : 승발전, 리그전, 토너먼트전
-체급 구분 : 경량급 –56kg 이하, 중(中)량급 –56∼-62kg, 중(重)량급 –62kg∼68kg, 무제한급 –68kg
-심판 : 배심 2명, 주심 1명, 부심 4명 7심제
-득점 부위 : 명치, 양 옆구리, 양 어깨, 안면(족기 공격에 한함)
-득점 구분 : 수권 공격 1점, 족기 공격(면상) 2점, 그 외 1점. 공격은 수권 1회 공격 후 족기 1회 공격하였을 시 득점으로 인정하며, 족기 공격은 연속 공격 인정. 주심은 이외의 기술을 억제한다. (1)넘어진 상대에 대하여 공격하는 것 (2)씨름 행위와 태클 등 기타 위험행위를 하는 것 (3)음부를 공격하는 것 (4)머리로 박치기 하는 것 (5)안면을 수권 또는 팔꿈치로 공격하는 것 (6)시간을 공비하는 것 (7)심판원의 주의를 받았는데도 행동을 거듭하는 행위 (8)상대에게 고의로 피해를 주기 위한 행위 (9)무례, 폭언, 폭행, 야비한 행위를 하는 것. 이상의 행동과 행위로 심판원에게 주의를 2회 받은 후 거듭 범하였을 때는 퇴장, 출전금지, 자격상실 등을 선언한다.
대한태수도협회는 제정된 경기규칙을 토대로 1963년 최초로 공식 대회를 개최했다. 1963년 2월 2일 국민회당에서 개최한 ‘1963년도 한국우수선수선발 제1차전’은 공식적인 전국대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어 2월 9일 같은 장소에서 2차전, 2월 16일 최종전이 열렸다. 이 대회는 호구를 착용하지 않고 이루어졌으며, 손기술의 얼굴 공격은 제한되었지만 걸어 넘기기나 쳐 넘기기 같은 기술이 허용됐다.(17)
첫 공식대회인 한국우수선수선발대회 입상자는 다음과 같다.
-김병원(한무관) 1위, 지선구(지도관) 2위
-황대진(전북지도관) 1위, 황녕학(한무관) 2위
-이충언(한무관) 1위, 이호웅(전북지도관) 2위
-신윤식(한국체육관) 1위, 조동섭(강덕원) 2위
-이승완(전북지도관) 1위, 김일식(한국체육관) 2위
-최창근(오도관) 1위, 최광식(전북지도관) 2위
그 해 6월 9일 국민회당에서 일본원정 파견 대표선수선발전을 개최해 12명의 선수를 선발하였다. 선발 명단은 경량급 –56kg 이하 이용준(3단)·김용태(3단), 중량급 –65kg 이하 김일식(3단)·이승완(5단)·이문성(2단)·황대진(2단), 중량급 –65kg 이상 최창근(3단)·조점선(4단)·안대섭(2단)·최영렬(1단)이었다.
초창기 대회는 경량급(輕量級)·중량급(中量級)·중량급(重量級) 3체급으로 열렸다. 1964년부터 무제한급이 추가되어 4체급으로 바뀌었고, 1965년에 핀급부터 헤비급까지 8체급으로 확대됐다. 대표적인 대회를 살펴보면 △1963년도 한국우수선수선발전(1963.2.국민회당) △제1회 전국중고등대학단체대항전(1963.6.국민회당) △3.1절기념개인선수권대회(1964.3.동국대강당) △제1회 전국태권도신인선수권대회(1965.4.한국체육관) △제1회 전국중고대종별개인선수권대회(1966.7.한성여고) △제1회 대통령기쟁탈전국태권도대회(1966.10.장충체육관) 등이다.
심판의 역할도 제한했다. 심판 인원수와 역할을 1961년 11월 2일 경기규정이 제정되면서 배심원 2명, 4단 이상 주심 1명, 부심 4명 등 7심제였다. 주심과 부심의 유무(有無)에 대해선 증언이 엇갈린다. 이종우는 “주심은 있었고 부심은 없었다. 처음에는 주심 혼자서 경기를 진행했으나 (주심이) 혼자서 하니까 다 기억을 못하니까 힘들어서 부심을 두 명을 놓고 깃을 들어서 손을 들어서 행하기도 했다”(18)고 증언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각 관별로 대련을 할 때 주심과 부심의 역할이 달랐고, 부심이 없는 관도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대회는 해외 파견 선발전을 제외하고 중기부와 고기부로 나뉘어 경량급(輕量級)·중량급(中量級)·중량급(重量級)으로 열렸다. 서울신문 후원으로 열린 제1회 대통령기쟁탈 태권도대회는 1팀에 6명씩 참가해 선봉·전위·중견·후의·주장·후보 순서로 체급과 관계없이 각 팀에서 선수 명단을 제출하고 5명이 순서대로 기량을 겨루는 단체전이었다. 관(館) 의식이 팽배했던 당시 태권도계는 승패의 이해관계에 따라 마찰이 잦았다. 여기에 군 참가팀의 혈기왕성한 응원과 의협심은 경기장을 가끔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당시 심판으로 활동했던 홍정표의 증언.
“해병대와 공수부대의 선수들이 맞붙어 경기를 할 때는 심판들도 긴장했다. 판정시비가 나서 해병대와 공수부대들이 싸움을 할 때는 심판들이 무서워 숨을 정도로 시끌벅적했다. 소속 부대 장교가 나와서 명령조로 말려야 그치곤 했으니까.”(19)
1960년대 중반에 이르자 겨루기 선수를 중점적으로 육성하는 학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학교는 전북 지도관의 영향을 받은 전주고를 비롯해 수송중, 당무중 등이었다. 대한태권도협회는 태권도 경기가 활기를 띠자 1968년 장충체육관에서 제1회 주한외국인태권도개인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이었던 김용채의 후일담.
“내가 회장을 맡았을 때는 이미 태권도가 경기단체로 대한체육회에 가입되어 있어서 대한체육회 건물에 태권도협회가 입주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된) 경기규칙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사범마다 서로 다른 점수를 주던 시기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경기규칙을 정해 경기단체로서의 토대를 마련했다. 경기화를 위해서 호구 개발에 노력하기도 했었는데, 처음에는 대나무를 넣은 호구였던 것으로 생각한다.”(20)
태권도 경기규칙은 1962년 11월 제정된 후 1972년까지 5차례 개정했다. 1963년 2월 26일 제1차 개정, 1964년 4월 23일 제2차 개정, 1967년 3월7일 제3차 개정, 1968년 6월 26일 제4차 개정, 1972년 1월 20일 제5차 개정을 했다. 이 중 1967년 제3차 개정과 1968년 제4차 개정 때 많은 것이 바뀌었다.
3차 개정 때는 득점을 차등화 했다. 발로 얼굴을 차거나 뛰어차기, 두발당상, 뛰어 옆차기, 몸 돌려차기 등은 2점을 줬다. 개인전 무승부일 때는 체중이 적은 선수를 승자로 규정했다. 4차 개정 때는 선수의 호구 착용을 의무화했고, 경기장은 정방형 8m로 축소했다. 또 경기시간은 1분 30초 2회전에서 2분 3회전으로 변경했다. 소년부와 여자부는 1분 3회전, 중간휴식은 30초로 했다.
한편 세계태권도연맹은 1973년 5월 28일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19개국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경기규칙을 제정했다.
3. 전국체육대회 태권도 종목의 특징
1962년 제43회 전국체육대회에 태권도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되고, 1963년 제44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태권도는 스포츠의 체계를 잡아나갔다. 경기규칙 제정, 경기장 규격 통일, 보호구 및 장비 개발, 심판의 기능과 역할 정립, 선수선발 등 무술에서 스포츠로 변화하는 기틀을 다졌다.
태권도는 1962년 10월 24일 경북 대구에서 열린 제43회 전국체육대회에 5인 단체전(고등부, 일반부)이 시범종목으로 참가했다. 당시 각 시·도의 태권도협회가 제대로 창립되지 않은데다 태권도 경기가 전국에서 고르게 이뤄지지 않아 대표 선수 구성이 원활하지 않자 전라북도와 경상북도에서 자체 선수들을 응급히 구성해 참가했다.(21) 이에 대해 윤종욱은 연구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전주 지방의 지도관을 중심으로 태권도 경기화를 적극 추진해 왔던 전라북도의 경우 이미 상당한 경기 경험을 가진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경상북도는 경기 경험이 전무했으며, 심지어는 협회조차 경기단체로서 제대로 체계를 갖추어 있지 않았다. 시범 경기를 위해 전라북도는 고등부, 일반부 두 팀이 출전하였으며, 경상북도는 부별 구분에 대한 개념도 없이 각 관을 중심으로 세 팀을 조직하여 경기에 참가했다.(22)
1962년 전국체육대회 시범종목에서 선수들이 사용한 기술은 주먹으로 얼굴가격을 금지하고, 걸어 넘기기는 허용했다. 경기방식은 단체전으로 체급 구분 없이 선봉-전위-중견-후위-주장 순으로 대전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시범경기에 대비해 경기규칙과 경기방식 등이 잘 준비되지 못해 전라북도와 경상북도가 공동 우승했다.(23)
태권도는 1963년 10월 전북 전주에서 열린 제44회 전국체육대회부터 단체전(중등부, 고등부,대학부, 일반부)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이 때 경기규칙은 전북에서 사용하던 수신호와 용어 등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다.
태권도는 1964년 인천에서 열린 제45회 전국체육대회부터 단체전에서 개인전(학생부, 일반중기, 일반고기) 각 부별 플라이급에서 헤비급까지 7체급으로 열리다가 1965년 전남 광주에서 열린 제46회 전국체육대회부터 가 부별 핀급부터 헤비급까지 8체급으로 확대되어 열렸다.
당시 태권도 경기는 전북 전주에 기반을 두고 있던 지도관 선수들이 맹위를 떨쳤다. 대표적인 선수가 이승완·조점선·황대진·안대섭·이문성·최영렬 등이다. 1963년 대한태수도협회 대표선수로 일본 공수도 선수들과 친선경기를 했던 이승완의 증언. 당시 선수들이 구사했던 기술을 알 수 있다.
“조점선, 안대섭, 황대진, 이문성, 최영렬 등 6명과 일본에 가서 가라테와 겐뽀 가라테와 교환경기를 했는데 경기방식은 룰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들 룰에 맞춰서 경기를 했고, 우리의 기술은 내치기, 주먹, 앞차기, 돌려차기, 옆차기를 주로 했는데 겐뽀 가라테 선수들은 링을 잡고 움직이는 것을 잘했고 가라테 선수들은 발차기와 주먹이 있었는데 그 발차기가 지금의 K-1에서 하는 로우킥 형식이야, 앞차기도 로우킥이고 옆차기도 로우킥인데, 우리선 수들이 돌려차기를 하는데 잘 막더라고 얼굴을 차면 차는 데로 맞는 거야. 돌려차기에 대한 방어가 없더라고….”(24)
이처럼 전북이 태권도 경기화를 선도하게 된 것은 전일섭이 이끄는 지도관이 전주에 자리를 잡은 뒤 다양한 종류의 대회가 자주 열렸기 때문이다.
한·일 교류전은 물론 전주와 군산지역 지도관끼리의 겨루기는 지역의 자존심을 건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김혁종은 “군산과 전주의 시합이 있을 때면 일주일 전부터 잠을 못 잤다. 전주에서 대회가 열릴 때 전주가 이기면 뒤탈이 없는데, 군산이 이기기라도 하면 버스터미널까지 쫓아 와서 버스를 못 타게 하고 텃세를 부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추억거리”(25)라고 회고했다.
대한태권도협회는 1966년 7월에 전국중·고·대·종별개인선수권대회와 10월에 대통령기쟁탈전국단체대항전대회를 창설했다. 그 해 열린 국가대표선발전은 1·2차 선발전을 통과한 선수와 그해 최우수 선발전 우승자가 최종전에서 맞붙어 각 체급별 대표를 선발했다. 모두 14명의 대표를 뽑았는데, 박동근·최동진·박연희·유기대·유형환·최동진 등 6명이 전북 출신이었다.(26)
최광근·장권은 “태권도 경기 중심 속에는 전북이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초창기 태권도 경기화에 적극적이었던 전라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언론의 시각을 통하여 우리나라 태권도의 경기화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이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초창기 태권도 경기의 시작과 발전배경에 대한 국내 주요 일간지와 전라북도의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분석하였으며, 경기화와 관련된 주요 인사와의 면담, 관련 문헌자료의 검토를 통해 자료를 보완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태권도 경기의 중심 속에는 전라북도가 있었다. 1962년 제43회 전국체전에서 태권도 경기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고, 당시 시범경기는 전라북도의 주도로 진행이 되었으며, 태권도 경기의 보호 장비인 호구 제작과 사용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등 전라북도는 태권도 경기화 출발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27)
4. 초창기 몸통보호구 특성과 의무화
우리나라에 소개된 몸통보호구는 일본 검도의 영향을 받은 ‘방구대타(防具對打)’ 호구였다. 1961년 5월 12일 전주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한국 전주 팀(지도관)과 일본 공수도 팀이 친선대회를 할 때 선수들이 이 호구를 착용하고 경기를 했다. 전주 지도관 출신의 유병용은 “초창기에는 얼굴에는 야구를 할 때 쓰는 마스크를 쓰고…손끝을 자른 것(얇은 장갑)을 끼고 얼굴을 때리기도 하고…검도할 때 입던 호구를 입기도 했다”(28)고 증언했는데, 이는 ‘방구대타’ 호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방구대타 호구는 빠른 동작과 기술을 해야 하는 태권도와 잘 맞지 않았다. 검도 호구는 칼날을 막기 위한 것으로 너무 단단하게 만들어져 자칫하면 손이나 발가락이 부서지기도 했다.(29) 따라서 태권도 경기에 적합한 보호구를 개발해야 했다. 이번에도 지도관 전북본관을 이끌고 있는 전일섭과 유병용이 적극 나섰다.
“태권도에 알맞은 호구 개발이 필요했는데, 많은 고민과 연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대나무 호구였다. 전일섭 관장과 유병용 사범 등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전일섭 관장의 부인이 바느질을 했다. 신문지로 본을 떠서 입어보고 만들었는데 애초에는 뒷부분이 없이 옆구리까지만 가렸다. 대나무를 쪼개서 세로로 배열하고 솜으로 감싼 뒤 베를 대고 누볐다.
이렇게 만들어진 호구는 대한태권도협회의 승인을 받아 62년 대구체전 시범경기 때 처음으로 사용된 뒤, 63년 전주 체전부터 본격적으로 활용됐다. 애초에는 위-아래 2단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위험성을 깨닫게 됐다. 대나무가 부러지면서 헝겊을 뚫고 삐져나와 손을 다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2단 호구는 중간에 접혀지는 곳이 명치 부근이어서 자칫하면 장기가 다치는 등 큰 불상사의 위험도 있었다. 따라서 나중에는 2단의 호구를 3단으로 개조했고, 그러다 보니 활동성도 훨씬 좋아졌다.”(30)
1962년 전국체육대회에서 시범종목으로 열린 태권도 경기는 경북 서수들에게는 매우 생소했다. 경북 대표로 경기를 한 최말교는 “호구복을 착용하고 경기를 하긴 했는데, 처음에는 호구복이라는 것도 몰랐고, 경기장에 가서 전라북도 팀이 만들어온 호구복을 처음 봤다”(31)고 증언했다.
몸통보호구(호구)는 1962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경기에서 개인이 제작해 사용한 호구가 최초의 태권도 보호구(32)라는 주장 속에, 1962년 전국체육대회 태권도 시범종목에서 대나무로 만든 몸통보호구를 정식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나무 호구는 무겁고 투박했다. 대나무 조각을 얇게 다듬어 광목천을 솜으로 감싸서 꿰맸는데, 선수들이 타격을 하다가 손과 발을 다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강원식은 “처음 호구는 대나무를 묶어서 만들었다. 원래 앞차기는 맨발로 찰 때 앞축으로 차게 되면 소리가 잘 안 나서 발등으로 차게 되면 소리가 잘 나니까 부심들이 소리를 듣고 점수를 주게 됐다. 소리에 의해서 채점이 이뤄지다 보니 발등으로 차는 ‘거적발 형태’로 공격해서 공격자의 부상이 매우 컸다”(33)고 했다.
유형환은 “당시(1960년대 중후반)에는 손기술이 많아서 (다치지 않기 위해) 손에 붕대를 감고 결기를 했다. 선수들이 경기를 하면 발로 몸통을 때릴 때 ‘딱’ 소리가 대나무에 맞아 나는 소리라는 것을 심판들이 듣고 점수를 줬다. 맞은 선수보다 공격한 선수가 더 부상을 많이…”(34)라고 말했다.
대한태권도협회는 1968년 경기규정을 개정해 몸통보호구 착용을 의무화했다.
*각 주
(1)양진방(1986). 해방이후 한국 태권도의 발전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2)최홍희(1966). 태권도교본. 294쪽.
(3)황기(1971). 수박도교본.
(4)홍정표 증언. 1997년 10월.
(5)국기원(2017). 외길 70년, 현대 태권도의 기틀을 다진 엄운규. 도서출판 대한미디어.
(6)임번장(1979). 스포츠 및 그 유사개념의 정의와 분류에 관한 고찰. 서울대학교 사대논총 19집.
(7)무카스. 2005년 2월 17일. 무도 경기화,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8)박성진. 도야마 간켄의 슈토칸이 태권도에 미친 영향 고찰. 2022년 5월 16일 태권도역사연구회 발제 내용.
(9)한경희(2009). 대한태권도협회 경기규칙의 변천 요인. 박사학위논문. 국민대학교 대학원 체육학과
(10)한창효(2000). 태권도 경기규칙 변천과정에 관한 고철 석사학위논문. 용인대학교 교육대학원, 28쪽.
(11)장권(2010). 한국 태권도 경기사 연구. 박사학위논문. 우석대학교 대학원. 162쪽 재인용.
(12)한창효(2000). 앞의 논문. 28쪽.
(13)한창효(2000). 태권도 경기규칙 변천과정에 관한 고철 석사학위논문. 용인대학교 교육대학원, 28쪽. 한창효는 강원식과 2000년 5월8일 면담을 했다.
(14)한창효(2000). 앞의 논문. 25∼27쪽.
(15)장권(2010). 앞의 논문. 164쪽.
(16)한창효(2000). 앞의 논문. 65쪽.
(17)대한태권도협회(2015). 대한태권도협회 50년사. 상아기획.
(18)한창효(2000). 앞의 논문. 26쪽. 한창효는 이종우와 2000년 5월 8일 면담을 했다.
(19)홍정표 증언. 1997년 10월.
(20)무카스. 2010년 1월 4일. 원로들의 이야기 김용채.
(21)1962년 전국체육대회 태권도 시범종목에 참가한 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전북 고등부는 유기대·오석환·최영렬·성광호·김재화, 일반부는 조점선·최광식·이호웅·이문성·문창균. 경북 지도관은 김정웅·장기용·박성규·권일웅·임의제, 청도관은 박종화·박정일·최말교·박재춘·소정섭이었다. 대한태권도협회(2014). 대한태권도협회 50년사.
(22)윤종욱(2008). 경북·대구지역 태권도 경기 발전과정. 영남대학교 스포츠과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3)윤종욱(2008). 앞 논문.
(24)장권(2010). 앞의 논문. 172쪽. 이승완 면담 2008.07.15.
(25)전북일보. 2014년 6월 11일.
(26)전북일보. 2014년 6월 18일.
(27)최광근·장권(2015). 태권도 경기화의 역사적 배경과 언론사적 의미:전라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체육사학회. 체육학사학회지 20권4호.
(28)장권(2010). 앞의 논문. 163쪽. 유병룡과 면담 2008.08.12.
(29)전북일보. 2014년 6월 11일.
(30)전북일보. 2014년 6월 11일.
(31)윤종욱(2008). 앞 논문 재인용.
(32)한창효(2000). 앞의 논문. 35쪽.
(33)김진경(2014). 태권도 겨루기 경기화 과정으로 살펴본 경기장 시설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전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재인용. 강원식 인터뷰. 2013.11.09.
(34)김진경(2014). 앞의 논문 재인용. 유형환 인터뷰 2013.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