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말 대한태권도협회와 반목 분쟁
-‘군대 후배’ 박정희 3선 개헌 반대하며 대립
-“북한도 내 조국, 태권도 보급에 이념 초월”
-“ITF는 정통 태권도”, 북한 사범요원 교육
서성원 기자 / tkdssw@naver.com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기 전 최홍희 행적
1955년 태권도를 작명(作名)한 최홍희는 언제, 어떤 배경 속에서 자신이 만든 국제태권도연맹(ITF) 태권도를 북한에 보급했을까? 먼저 그 전의 행적을 보자.
1966년 3월, ITF를 창립한 최홍희는 단증 발급과 해외 사범 파견 등의 문제로 대한태권도협회와 충돌했다. 그는 1968년 ‘국제사범양성소’를 만들어 해외에 태권도를 보급하고 지도할 수 있는 사범들을 키웠다. 하지만 대한태권도협회도 해외 파견 사범에 전력을 기울이자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최홍희는 ‘길을 닦아 놓으니 문둥이가 지나 간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대한태권도협회를 싸잡아 비난했다. 특히 “중앙정보부의 끄나풀처럼 된 그들은 국내 협회의 주도권을 잡고 정통파 태권도인들을 배척할 뿐만 아니라 내게 까지 대항하려 드는 것”<최홍희(2005). 태권도와 나. 도서출판 길모금. 22쪽.>이라며 대한태권도협회와 날을 세웠다.
1968년 4월, 문교부가 시상하는 체육상 연구부문에서 최홍희가 대상을 받자 대한태권도협회는 수상이 온당하지 않다며 반대했다. 최홍희가 저술한 태권도 서적이 가라테 서적을 표절해서 대외적으로 한국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대한태권도협회는 ITF가 파벌을 조장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ITF 해체를 주장하며 태권도 해외 보급과 지도자 파견 등 대외 업무를 전담할 ‘국제분과위원회’를 신설했다. 이에 최홍희는 강하게 반발했다.
“대한태권도협회 일부 간부들이 일본의 공수도(가라테)를 보급하고자 함으로 본인이 이를 저지하고자 다년간 그들에게 충고를 했는데 (…) 대한태권도협회는 작년 7월 15일 국제태권도연맹에 정식 가맹했고 협회장은 본 연맹 부총재직과 한국지부장까지 겸임했음에도 불구하고 협회는 본인의 체육상 수상을 방해할 목적으로 4월 17일 일방적으로 탈퇴한 것인데, 협회가 국제태권도연맹을 제거하였다 함은 실로 상식 외의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강원식·이경명(1999). 태권도 現代史. 보경문화사. 163쪽.>
이처럼 대한태권도협회와 반목하는 가운데, 박정희 정권과도 불편했던 최홍희는 갈수록 입지가 좁아졌다. 최홍희는 박정희를 향해 “군 시절 나에게 ‘각하’라고 부르며 항상 나를 어려워하던 박정희가 한 나라의 정권을 잡았다 해도 3선 개헌 지지압력 등을 뿌리치며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나를 부담스런 존재로 여겼을 것”<최홍희(2005). 앞의 책. 298쪽.>이라고 했다.
박정희 독재체제가 구축되자 최홍희는 1971년부터 망명 계획을 짰다. 해외여행이 통제되는 등 국내 정세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감지하고 탈출을 감행했다.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한 것은 1972년 3월. 1개월을 기다려 이민수속을 밟은 그는 제자의 도움을 받아 노동허가증을 받고 토론토에 정착했다.
최홍희는 왜 캐나다를 선택했을까? 그 이유는 캐나다가 중립국이라 태권도 이념에 합치되고 조국통일 운동을 하는데 안성맞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던 1973년, 김운용 주도로 세계태권도연맹이 창설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최홍희는 박정희가 태권도를 정치도구로 쓰기 위해 세계태권도연맹을 만들었다고 분개했다. “첫 태권도 국제기구인 ITF를 군대 후배 박정희가 정치적(3선 개헌)으로 이용하려다 내가 반대하고 캐나다로 망명하니까 김운용을 시켜서 만든 게 세계태권도연맹”<월드코리안뉴스(woridKorea). 2021.12.09.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40.>이라고 할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최홍희는 위축됐다.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외압 등 여러 가지 이유로 ITF를 이탈하자 최홍희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폴란드와 헝가리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로 눈을 돌렸다. 그 후 1979년 동유럽 4개국과 서유럽 10개국이 참여한 ‘통일유럽태권도연맹’을 만들어 사상과 이념, 종교를 초월해 태권도를 보급하고 싶다는 열망 속에 소련과 중국, 북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80년 북한에 ITF 태권도 전수
최홍희는 1979년부터 비밀리에 북한 방문을 추진했다. 당시 그의 심경을 보자.
“국내외 제자들은 대부분 내 곁을 떠났다. 나와 가까우면 너도 빨갱이로 처벌 받는다고 온갖 협박 등을 제자와 가족들에게 했기 때문이다. 최홍희 개인 대 박정희 국가 세력과는 싸움 자체가 될 수 없었다. 이제 내 정통태권도가 매장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고민 끝에 북한에 ‘내 태권도를 배울 생각이 있느냐’고 편지를 썼다.”<월드코리안뉴스(woridKorea). 2020.07.25.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 땅-3.>
최홍희는 조선체육지도위원회에서 공식 초청장을 받자 이기하·박정태·림원섭·이석희·최중화·김석준 등 제자들과 외국인 사범들을 모아 북한을 방문했다. 1980년 9월이었다. 북한에 ITF를 보급하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최홍희는 북한에 간 동기에 대해 “태권도를 가르칠 수 있는 곳이면 이 세상 어디든 간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북한도 내 조국인데 가지 못할 이유가 뭔가. 북한은 국제태권도연맹 산하에 있는 가입국의 하나”<인사이드월드. 1997년 3월호.>라고 말했지만, 갈수록 자신의 입지와 ITF가 쇠퇴하는 상황에서 북한은 시도해볼만한 ‘태권도 미개척지’였을 것이다.
최홍희 일행은 조선체육지도위원회의 환대 속에 평양체육관에서 2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시범을 했다. 체육관 벽면에는 ‘조국을 방문한 최홍희 선생과 그 일행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펼침막에 걸려 있었다. 그 후 평양과 지방을 오가며 2주 동안 펼친 시범은 성공적이었다. 시범을 보였던 박정태는 “(함께 선보인) 격술은 태권도보다 기술이 많이 떨어졌다. 격술 고단자들과 세미나를 갖고 기술을 검토·비교하기도 했다”<월드코리안뉴스(woridKorea). 2021.12.09.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40.>고 말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최홍희는 북한 태권도 사범요원 교육을 맡았다. 7개월 동안 교육을 마치고 44명의 교육생 중 19명에게는 4단, 나머지는 3단을 줬다. 그는 “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보통 10년 이상 배워야 할 그 많은 동작들을 완전 습득한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최홍희(1998). 태권도와 나 2. 도서출판 다움. 323쪽.>고 기뻐했다.
이처럼 최홍희가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자 국기원과 세계태권도연맹을 따르는 국내외 태권도인들은 그를 향해 ‘빨갱이 태권도인“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뉴욕태권도협회는 “태권도인은 반공을 국시(國是)로 하는 대한민국의 반공사상에 투철해야 한다. 반공사상을 위배한 최홍희의 배신적 행위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경향신문. 1980.09.25.>는 성명을 발표했다.
최홍희에 대한 북한의 평가는 최홍희가 북한에 태권도를 전수하기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 북한은 최홍희를 조국과 인민을 배반한 역적이라며 ‘반공분자’, ‘반역자’라고 성토했다. 북한 태생이지만 한국전쟁 때 남한의 장성으로 북한 인민군과 맞서 싸운 전력을 문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최홍희가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면서 친북성향을 띠자 ‘조국을 버리고 남조선과 해외로 다녀봐야 조국이 제일이고 장군님의 품을 떠난 인생은 낙엽 같은 것이다. 조국과 수령님의 품만이 진정 자기 운영을 맡길 수 있는 품’이라고 선전했다.<데일리 NK. 2011.03.23.> 최홍희가 북한 당국의 대남선전용으로 활용된 것이다.
최홍희는 1980년대 초 친아들 최중화를 평양으로 보냈다. 북한에 간 최중화는 최홍희의 뜻에 따라 사범요원을 교육하며 ITF 태권도를 가르쳤다. 당시의 상황을 최중화는 이렇게 회고한다.
“80년대 부친이 ‘이북도 우리 민족이고 태권도를 모르면 안 된다’면서 태권도 시범단 16명을 구성해 이북을 방문했다. 나도 시범단의 한 명이었다. 이후 이북과 계약을 하고 사범교육을 했다. 1981년 1기, 1982년 2기생을 교육했다. 하지만 3기부터는 이북 자체에서 교육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우리 보고 손을 떼 달라는 얘기였다. 이후 본의 아니게 이북에서 약 2년간 더 생활한 뒤 1983년 동유럽으로 나와 태권도를 보급했다.”<동아일보. 2008.09.08.>
당시 최홍희는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면서 △해외에 파견된 국제사범은 ITF가 지휘 통제한다 △총재를 통해서만 해외에 나가 있는 사범들과 접촉할 수 있다 △조선태권도위원회는 ITF 승인 없이 어떠한 나라에도 시범단이나 사범을 파견할 수 없다는 등의 원칙을 고수했다.<최홍희(1998). 앞의 책. 448쪽.>
이는 ITF가 북한에 귀속되면 안 된다는 최홍희의 강한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은 태권도 기술을 전수받자 사범양성 및 파견과 시범단 운영을 자체적으로 하겠다고 최홍희와 선을 그었다.
북한은 ITF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북한 식의 이념과 운영체계를 구축했다. 국제적인 고립과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 우리식 사회주의와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표방했는데, 민족체육으로 태권도를 집중적으로 육성한 것이다. 1992년 김일성의 ‘태권도 과학화와 생활화’ 지침을 김정일이 ‘ITF 태권도와 건강태권도’ 프로그램으로 구체화했다. 이를 계승한 김정은은 2015년 태권도를 전략종목으로 지정하고 ‘온 나라를 태권도화’하도록 했으며,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도 지정하는 등 태권도를 중시하고 있다.<통일뉴스. 2020.02.17. 홍성보 기고. 2032년 공동올림픽을 위한 남북 태권도 협력(1).>
한편 2002년 6월 북한에서 타계한 최홍희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