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명칭은 1955년 4월 11일 만들어 정했을까?
서성원 기자 / tkdssw@naver.com
‘태권도(跆拳道)’ 명칭은 최홍희가 주도적으로 만들고, 남태희가 힘을 보탰다.
최홍희의 주장대로 태권도 명칭은 1955년 4월 11일 제정했을까? 태권도 명칭을 둘러싼 미스터리한 내막을 살펴보자.
최홍희는 1953년 9월, 보병 제29사단을 창설하라는 명령을 받고 제주도 모슬포로 내려갔다. 당시 육군참모 총장 백선엽의 견제를 받고 있던 그는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로 여기고 전력을 다했다.
그는 29사단을 상징하는 사단기를 만드는 데 힘썼다. ‘29’라는 숫자에서 ‘2’는 분단된 한반도를 상징화했고, ‘9’자는 움켜쥔 주먹을 나타냈다. 한반도 지도에다 주먹을 그린 사단의 마크는 ‘익크 부대’1)로 통용됐다.
당시 최홍희는 청도관2) 출신의 남태희를 만났다. 남태희의 증언.
“최홍희 장군과는 29사단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육군종합학교 다닐 때 최 장군이 부총장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인연이 없었다. 29사단에 근무하면서 화랑무도관을 만들어 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29사단장이던 최 장군이 화랑무도관에 방문해 나보고 형(型)을 해보라고 시켰고, 나는 청도관 이원국 관장님께 배훈 형을 시연했다. 최 장군은 부사단장이었던 하갑천 장군과 함께 아주 흡족해 했고, 그게 나와 최 장군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3)
최홍희는 부관 남태희를 앞세워 휘하 장병들에게 당수를 가르쳤다. 그는 “내 휘하 장교들과 당수 교관들에게 매우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당수를 훈련할 때 군대의 계급과 상관없이 전부 교관들에게 인사를 해야만 했다. 군사 교련과 당수 훈련의 결합은 우리 사단을 한국군의 다른 사단 중에서 유별나게 만들었다”4)고 말했다.
최홍희가 이끄는 29사단은 1954년 6월 제주도를 떠나 육군본부직할의 제1군단에 배속됐다. 이 무렵 최홍희가 이끄는 29사단은 설악산 서쪽의 용대리로 옮겨 강원도 동해안을 포함한 일대의 작전 책임을 맡았다. 이 때 그는 체육관을 짓게 하고 그 곳을 ‘오도관(吾道館)’이라고 했다. 오도관 초대 사범이었던 남태희를 비롯해 백준기, 고재천, 김석규, 우종림, 한차교 등은 모두 청도관 출신이었다.
그 해 9월, 제1군단 창설 4주년 기념일이 열렸다. 이 날 창설 기념식에서 최홍희가 이끄는 사단의 장병들이 당수도 연무시범을 했다. 이 광경을 이승만 대통령은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최홍희의 증언.
“대통령은 앉지도 않고 줄곧 서서 구경하더니 “저것이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있던 택껸이야?” 한 다음 “이것으로 깨뜨렸지?‘ 하며 자기 오른 주먹의 사용 부분을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가리켰다. 뿐만 아니라 그는 ”택껸이 좋아. 이것을 전군에 가르쳐야 해. 그 서양 사람들은 윗동이만 쓰는데, 발로 차면 빙그르르 주저앉을 게 아닌가“라고 조크까지 했다.”5)
이승만의 이 같은 말은 최홍희의 가슴을 뛰게 했다. 최홍희는 곧바로 당수도를 대신할만한 명칭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부관 남태희와 함께 옥편을 뒤적거리며 이승만이 말한 태껸의 발음에 주목했다. 남태희의 증언.
“이승만 대통령에게 시범을 보인 날 최홍희 장군이 나와 같이 사단장실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이 이야기한 태껸을 옥편에서 찾아봤지만 없었다. 계속 옥편을 찾아보다가 ‘밟은 태(跆)’를 발견했다. 일단 태를 골라 놓고 그 다음 ‘껸’를 찾았지만 옥편에 없었다. ‘수(手)’자도 고려했지만 당수도, 공수도 등 색채가 진해서 손보다는 강한 ‘주먹 권(拳)’을 선택했다. 태껸과 태권은 발음도 비슷했다. 최 장군과 나는 태권이라는 명칭이 좋겠다고 결심했고…”6)
최홍희는 “1946년 3월부터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만 9년이 되는 1955년 봄에 이르러 현대적 무도의 기초를 완성하게 되었다”7)며 기뻐했다.
이처럼 각고의 노력 끝에 태권도를 작명했지만 최홍희의 고민은 계속됐다. 태권도가 당수도와 공수도를 제치고 보편타당성을 확보하려면 공신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군 내부의 모략과 당수도와 공수도, 권법을 사용하고 있는 민간 도장의 반발이 걱정되었다.
최홍희는 마음 속에 태권도를 숨겨 놓고 기회를 기다렸다. 궁리 끝에 그는 ‘명칭제정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최홍희는 당시 자신을 지원하던 장군 이형근의 힘을 빌려 국회 부의장 조경구를 비롯한 사회 저명 인사와 언론인들이 참석8)한 가운데 고급 음식점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는 이날을 1955년 4월 11일이라고 주장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최홍희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 국내 도처에서 같은 무도를 놓고 당수, 공수, 권법 등 제각기 마음대로 명칭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새로운 이름을 제정하기 위해 모였다”며 이날 모임의 취지를 설명한 최홍희는 각자 명칭을 기재하여 무기명으로 투표한 다음 토의에 붙여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명칭 제정은 최홍희의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최홍희의 증언.
“개표 수가 거의 5분의 4에 이를 때까지 당수가 아니면 공수도 일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머리 속에는 일본 가라테만 박혀 있을 테니까. 그러다 ‘태권’ 두 글자가 나오니 모두들 처음 듣는 이름이기도 하려니와 좀처럼 드문 ‘태’자라 ‘이것을 누가 냈는지 설명하시오’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먼저 글자 풀이부터 해야겠기에 ‘태’자는 발로 뛴다, 찬다 또는 밟는다를 의미하며 ‘권’자는 주먹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주먹은 단순히 손을 폈다 쥐었다 하는 주먹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주먹으로 찌르고, 뚫고 혹은 때리는 무도 행위를 뜻하는 주먹입니다’라고 하며 시범을 했다.”9)
최홍희는 이승만을 경호하는 경무대 실력자들을 고급 술집에서 융숭하게 접대해 ‘택껸’을 고집하는 이승만에게 한자로 쓴 ‘跆拳道 雩南’ 휘호를 받아냈다며, “태권도를 창시하기 위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과 술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태권도가 탄생한 1955년 4월 11일 저녁은 내 기쁨이자 그 어떤 말로나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10)고 밝혔다.
이런 연유로 최홍희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4월 11일을 ‘태권도의 날’로 제정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경명은 이 같은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태권도 명칭 제정과 이승만에게 태권도 휘호를 받는 과정이 의혹 투성이라는 것이다.
이경명은 태권도 명칭이 1955년 4월 11일에 제정했다는 최홍희의 주장은 “조작되었고, 4월 11일은 가공된 날짜라고 단언할 수 있다”11)며, 최홍희가 저술한 『태권도교서』(1973)에 수록되어 있는 명칭제정위원회 사진도 1955년 12월 19일 청도관 고문회 모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명칭제정위원회 사진 옆에 편집되어 붙어 있는 정체불명의 신문기사12)는 신문제호와 날짜, 기자 이름이 빠져 있어 사료 가치가 결여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또 최홍희가 저술한 『태권도백과사전 1』(초판 1983, 수정재판 1987)을 보면, 서울 종로 국일관에서 열린 기념사진이 실려 있는데, 사진 아래에 한자로 ‘大韓唐手道 4288. 12. 19. 靑濤館 第一會 顧問會’라고 되어 있다. 최홍희는 이 사진을 가리켜 태권도 명칭제정위원회 회의 사진이라고 한다는 게 이경명의 주장이다.
이 같은 주장에 최홍희를 보좌한 정순천은 이렇게 주장한다.
“최홍희 총재가 1955년 4월 11일 주도한 명칭제정위원회가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요약되지만 (…) 이경명 반론 이후 최홍희 총재를 찾아가서 명칭제정위원회의 배경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결과, 동아일보에 명칭제정위원회의 사진이 보도되었다는 것은 최 총재가 언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 최 총재의 주장은 명칭제정위원회 기사가 언제 어떤 신문으로 나갔는지 알 수 없으며, 기사가 나간 날짜 또한 4월 11일 이후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았다(…)”12)
태권도 명칭을 제정한 날이 정확히 언제인지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각주]
1)최홍희는 29사단을 ‘익크부대’로 한 것에 대해 “신익희 선생을 존경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신익희의 ‘익희’ 두 자를 연상한 것이며, 주먹은 9자를 의미하는 동시에 내 주먹으로 38선을 때려 부수겠다는 데 그 진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최홍희(2005). 태권도와 나. 도서출판 길모금.153쪽.
2)백준기(2006). 태권도신문. 2006년 10월 16일. 엄운규는 “최홍희가 29사단장으로 있으면서 군에 입대한 청도관 출신의 유단자들을 적극 활용했다. 교관으로 차출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청도관과 가깝게 지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태권라인. 2011년 6월 15일.
3)태권도. 대한태권도협회. 2010년 6월호(165호). 106쪽.
4)태권도타임즈. 2000년 1월호.
5)최홍희(2005). 태권도와 나. 도서출판 길모금. 155쪽.
6)태권도. 대한태권도협회. 2010년 6월호(165호). 107쪽.
7)최홍희(2005). 앞의 책 159쪽.
8)이날 회의 참석자는 미창사장 유화청, 청도관장 손덕성, 제3군관구사령관 최홍희, 연합참모총장 이형근, 국회부의장 조경규, 민의원 정대천, 정치신문사장 한창완, 정치신문주간 장경록, 공익통상부사장 홍순호, 후좌본사주간 고광래, 청도관 사범 현종명 등이다.
9)최홍희(2005). 앞의 책. 160∼161쪽.
10)최홍희(2005). 앞의 책. 162쪽.
11)이경명 인터뷰. 2011년 12월 22일. 이에 대한 글은 이경명(2002)이 저술한 『태권도문화의 뿌리를 찾아서-태권도의 어제와 오늘』(어문각)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12)이 기사에 따르면, 최홍희가 제안한 ‘태권’ 명칭에 대해 유화청 사장이 전적으로 찬동하면서도 국가의 무도명을 개칭하는 문제는 여러 사학자들과 학계의 고찰을 거쳐야 하고 마지막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곧이어 3인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1955년 12월 31일까지 완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3)정순천의 이 같은 주장은 2005년 12월 27일 정순천이 운영하고 있는 ITF태권도연구소, ‘밖에서 본 태권도사 – 태권도 명칭의 기원’을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