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휴스턴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병수(83) 사범은 태권도 원로다. 1953년 창무관에 입관에 현재까지 도복을 입고 수련과 지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김병수 원로가 걸어온 태권도 궤적은 선명하다. 풍경화를 보는 것처럼 또렷하다. 그의 생애(生涯)와 비록(祕錄)은 개인의 기록인 동시에 태권도 실록(實錄)이다. 태권도 현대사를 관통하는 영욕과 흐름이 오롯이 담겨 있다.
따라서 그의 증언과 후일담은 태권도 현대사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고 해석을 풍성하게 하는 ‘보고(寶庫)’가 될 것이다.
2021년 9월부터 그와 전자우편 및 SNS를 통해 주고 받은 내용과 자료를 토대로 삼아, 인터뷰 형식으로 그의 태권도 생애와 소신, 추구하는 방향을 싣는다.
서성원 기자 / tkdssw@naver.com
[인터뷰] 재미 김병수 태권도 원로
-“한국 사범은 태권도만 가르쳐야 한다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60년대 후반 ‘신형(新型·품세)’ 만들어 기존 무도 전통 지워”
-정치와 파벌, 스타일 초월하는 ‘자연류 생활무도’ 원칙 추구
Q. 해방 후 태권도의 변화 과정과 그 흐름 속에서 무엇을 고민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A. 1945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이른바 1세대들이 새로운 지식으로 권법과 공수도, 당수도라는 무술을 지도하다가 1950년 6.25 전쟁으로 중단됐습니다. 그 후 1952년부터 서서히 부활하기 시작해 당수도, 공수도, 권법을 했습니다. 3세대에 속하는 나는 1960년대 말까지 같은 교육과 수련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영향으로 각 관들이 협회를 만들어 정부 산하 대한체육회에 가입해 대한태수도협회(大韓跆手道協會)를 창설했다가 1965년 대한태권도협회(大韓跆拳道協會)로 명칭을 바꿨습니다. 차차 무도에서 스포츠로 확장되어, 1994년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성취를 했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공연 예술로서 변화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다변화했군요. 알맹이도 모양도, 현재의 태권도는 변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화 형태는 큽니다. 무도를 학문과 철학예술로 연구하는 우리들은 겸허히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의 장난질에는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무도의 변화를 민족주의, 일제 항거 독립운동, 애국투쟁 등으로 합작하는 것은 순수 무도에 누를 끼치는 일이라 봅니다. 우리가 왜 민주주의를 사랑합니까? 믿음의 자유, 학문의 자유, 출판의 자유 속에서 우리는 현재 21세기 주역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좁은 틀에서 벗어나야 크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범은 태권도만 가르쳐야 한다’는 무지한 태도는 세계 속에서 갈 곳이 없어집니다. 공수도(空手道)를 가르쳤다고 왜놈 앞잡이, 친일파라고 하는 무지한 집단이 있는 것이 옳은 것인가요? 잊혀져가는 옛 무도 지식을 보존하는 작업은 아주 중요합니다. 내가 해외로 이주한 목적 중 하나는 옛 지식 보존과 연구 발전이었습니다.
가끔 나를 필요로 하여 재수입하려는 운동도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정치인들과 종교 장사꾼 술수의 노리개로 전락하지 말고 학문으로 떳떳하게 출발해야 합니다.
Q. 1960년대 후반, 미국으로 이민을 간 까닭이 궁금합니다.
A. 1960년대 한국 무도계를 전망해 보니 서서히 기존 무도지식을 버리고 스포츠로 향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기존 무술 지식과 전통을 보존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다짐하고, 해외로 나가 사라져가는 윤병인 선생(YMCA 권법부 창설자)의 무술과 전통을 유지하는 길이라 믿고 1968년 미국으로 왔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하던 ‘한국태권아카데미’를 후배에게 물려준 후 100달러를 손에 들고 영주권도 없이 비행기에 올랐죠.
남들이 나를 보고 미쳤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무도 모르는 택사스로 무작정 탈출하는 기분으로 왔으니까요. 해외로 나간다는 것 자체가 당시는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탈진 상태에서 이민국에 걸어가서 나의 뜻을 밝히고 이민관을 설득했습니다.
이민관은 내게 왜 미국에서 살려고 하느냐며 여행과 세미나가 끝났으니 한국으로 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깜짝 놀라 준비한 말을 몽탕 잊은 순간, 평소 내 소신이 입 밖으로 나왔습니다.
“미국이 나를 필요로 합니다! America needs me!”
순간 이민관이 놀라 한동안 날 쳐다보다가 종이 한 장을 주며 내 의중을 써서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하더군요. 일장의 드라마와 같은 장면이었죠. 이렇게 맨손으로 휴스턴을 개척했습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난 후 한국에서는 소위 신형(新型)을 만들어 기존 무도 형들을 지우는 작업에 들어갔죠. 나의 2세대 선배들은 신형을 만들려고 예전의 것을 몽탕 버려야 했습니다. 결국 한국에서는 윤병인 선생의 무도 지식은 사라졌습니다. 물론 다른 관들도 그러합니다.
Q. 도장 간판을 ‘태권도’라고 하지 않고 ‘Kim Soo Karate’라고 하는 이유가 있는지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A.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나는 1950년 초 중학생 때 정식으로 무도를 배웠습니다. 전쟁 피난 시절에 마산에서 어느 청년이 연봉대를 치면서 주먹 쥐기와 치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창무관 중앙본관에서 학생들이 함께 배웠는데, 학문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로 싸우는 목적으로 배우며 학생들과 싸우기도 했죠.
당시 내 선배였던 유단자 초단, 이단 교사들이었지만 대련을 하면서 인정사정없이 하길래 나도 살아남기 위해 심하게 했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에게 무도 지식에 대해 질문할 수도 없었고, 그들도 몰랐습니다. 이남석 사범에게서 공수도는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가르쳤다는 정도만 들었습니다. 윤병인 사범은 무도 학식이 제일 높은 분인데 전쟁 중에 행방불명 됐고요.
당시 창무관에는 중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많았는데, 열심히 수련하면서 2단, 3단이 되고 보니 그냥 때리고 차는 것만 할 것이 아니라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구 아버지가 안국동 인사동 입구에서 고서적 책방을 했는데, 그 곳에 가서 책을 뒤지다가 『공수도 대감』이라는 슈도칸(修道館, Shudōkan) 도야마 칸켄 선생이 쓴 낡은 책을 찾았습니다. 책의 마지막에 사범들의 이름이 있었는데, 윤병인 사범 이름도 발견했습니다. 아무도 신경을 안 쓰던 정보를 내가 찾아낸 것입니다. 나의 선배, 즉 2세대 사람들도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질 않았죠.
홍정표 사범과 박철희 사범에게 넌지시 물었는데, 아마 슈도칸 후나고시 키친 계통일 거라고 얼버무리더군요. 그 분들은 연구도 않고 묻는 것을 반기지 않았어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슈도칸 도야마 칸켄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일본을 몹시 경멸하던 때여서 지도관 윤쾌병 사범도 대놓고 우리가 하는 무도가 어디에서 왔다고 말을 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청년들과 군인들은 고구려 시대에 했고, 신라 화랑도가 했다는 등 소위 민족 투사들이 있었죠.
내가 연구를 해보니 창무관 선조인 윤병인 사범은 중국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시절에 도야마 칸켄과 인연이 닿아 당시 최고의 단인 4단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배운 것이 공수도와 중국 권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것을 제자들에게 전수하면서 화랑도가 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도, 무예, 공수도, 당수도, 권법 모두가 문화 예술입니다.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쓰던 용어 들입니다. 나는 정치인도 독립투사도 아닌 학자이자 무인입니다. 수십 년의 지식을 몽땅 버리고 1960년대 후반부터 새로 만든 형을 하라고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문화와 예술전통을 고수하고 지키는 것이 나의 도리라고 생각했죠.
1970년대 최홍희 씨가 나를 무척 좋아해 자기 편으로 오라고 했지만 나는 일절 사절하고 윤병인 사범을 지향하는 것을 고수했습니다. 내 도장에 와서 ‘Kim Soo Karate’라는 큰 간판을 보면서 이젠 그만 가라테를 쓰질 않아도 된다고 최홍희 씨가 말하더군요. ‘태권도’로 간판을 달라면서요.
그 때 내 대답은 기본형, 평안형 등 수많은 문화재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어찌 말도 안 되는 행위를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왜식집을 하면서 한국 설렁탕집이라 할 수도 없고, 한국 전통 음식점에 중국 음식집과 왜식 간판을 달 수 없으니까요.
나는 일본 오끼나와 형을 가르치면서 그 나라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면서도 문화와 기술은 개인의 연구에 따라 하면 되고, 한국 신형(新型)을 가르치면 ‘태권도 한국 신형’이라고 합니다. 나는 지금도 윤병인 선생님의 권법, 단권, 장권, 도주산 등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라며 전수하고 있습니다.
‘Karate’ 단어는 이미 외래어입니다. 사전에도 오래 전에 나오는 단어이며, 일본인들도 ‘Karate’가 일본 것이라고 하는 사범은 없어요. 한국에서 하면 ‘한국 가라데’, 미국에서 하면 ‘American Karate’, 일본에서 태권도를 하면 ‘Japanese Taekwondo’라고 쓰면 됩니다.
한국인은 꼭 태권도만 가르쳐야 한다는 말도 이해가 안 됩니다. 70년 동안 수련하고 연구한 것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일가요? 나의 제자들은 나를 한국인으로 높이 평가하며 고마워합니다.
나는 국적을 따지지 않습니다. 내 제자들은 가라테 학생들과 오만 종류의 계통에서 와서 배우고 있습니다. 내가 추구하고 있는 ‘자연류 생활무도’는 파(派)와 스타일을 초월하는 진리와 ‘PRINCIPLE(원칙·신조)을 강조해 누구와도 자유롭게 대담하며 무도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Q. 미국에서 태권도를 어떻게 지도하고 있는지 평소 소신과 철학이 궁금합니다.
A. 나는 1960년대 후반까지 한국에서 ‘프로 사범’이었습니다. 건국대, 한국외국어대, 태권아카데미,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휴스턴에서 Rice University, University of Houston Main campus, University of St. Thomas, Texas Southern Univ 등에서 무도를 지도했고, 40년 동안 개인 도장을 운영하면서 거의 12시간 무도 교육와 보급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 수많은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앞날에 길잡이, 즉 콤퍼스(compasses) 역할이 되도록 교육 강화를 해 왔습니다.
현재는 본관에서만 지도하고 있습니다. 경기 스포츠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그런 의도도 없었지요. 수많은 학생들 중 단 1%의 학생도 선수가 되려고, 올림픽에 나가려고 내 도장에 오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나는 교육적인 차원에서 Science, Philosophy, 그리고 호신과 정신 강화를 목적으로 지도하고 있으니까요.
가끔 보면, 태권도를 정치와 종교와 국위선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태권도는 독립된 학문으로 거듭 태어나고, 도구로 이용당해서는 안 됩니다. 오래 전에 통일교에서 휴스턴 대학 강당을 빌려 대한민국 무술 시범을 했습니다. 뻔했지요. 수많은 외국인들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무용단이 공연하고, 시범에 앞서 통일교를 보급하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이래서는 안 된다고 언론에 기고를 했더니 한국여자와 일본인 남성이 찾아와 항의를 하더군요. 이러한 식으로 특정 종교 보급을 위해 태권도를 앞세워 하는 것이 국위선양을 하는 건가요?
나는 올바른 교육자로 존경받는 한국 사범으로 평생을 갈 것입니다. 미국 것은 미국 것, 한국 것은 한국 것, 오키나와 것은 오키나와 것, 일본 것은 일본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제자들은 수준 높은 박사, 교수, 의사, 변호사 등도 있지만 나는 80대 중반인 지금도 그들에게 배우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