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휴스턴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병수(83) 사범은 태권도 원로다. 1953년 창무관에 입관에 현재까지 도복을 입고 수련과 지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김병수 원로가 걸어온 태권도 궤적은 선명하다. 풍경화를 보는 것처럼 또렷하다. 그의 생애(生涯)와 비록(祕錄)은 개인의 기록인 동시에 태권도 실록(實錄)이다. 태권도 현대사를 관통하는 영욕과 흐름이 오롯이 담겨 있다.
따라서 그의 증언과 후일담은 태권도 현대사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고 해석을 풍성하게 하는 ‘보고(寶庫)’가 될 것이다.
2021년 9월부터 그와 전자우편 및 SNS를 통해 주고 받은 내용과 자료를 토대로 ‘김병수 생애사’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註 서성원 기자>
서성원 기자 / tkdssw@naver.com
재능 많은 박철희 따라다니며 무술 연마
휴전 후 송덕기 만나 1963년 태껸 함께 촬영
#강덕원 박철희 사범과의 추억
박철희는 옛 양반 중류층 집안의 독자로 생활이 빈궁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직장에 다니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육사생도들에게 권법을 지도했다. 책을 많이 읽어 달변가인데다 무술 재능이 뛰어나 경무대 경호·경찰 지도사범도 겸했다. 김병수의 후일담.
“박철희 사범은 다른 도장 사범들과는 근본적으로 질(質)이 달랐어요. 대련 방법과 기술에만 중점을 두지 않고 정신 강화 교육을 동시에 했어요. 예를 들면 왜 무술이 필요한가?, 무술의 힘을 어떻게 인생에 적용하는 등의 강의를 20분 정도 했죠.”
김병수는 이런 점에 매료되어 1950년대 중반부터 9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요일에도 박철희를 따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대학생 시절, 박철희의 조교로 경무대에서 경찰들을 지도할 수 있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김병수는 “박철희 사범은 전세로 개인 도장을 개설하지 않고, 여기 저기 무술 도장과 회사 창고, 형무소 강당, 청년회관 등에 수련장을 마련해 권법을 지도했다”며 “그래서 그 분은 직계 제자 몇 명과 나처럼 창무관에서 넘어온 동료 등 10여 명의 제자들이 전부였다”고 회고했다.
이런 가운데, 1959년 광주학생 반일의거 30주년을 기염해 ‘전국학생택권도특별연무대회’가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열렸다. 이 대회를 주관한 전국학생택권도연합회의 토대는 대한학생택권권법회로 박철희가 주도해 한국외대와 연세대 학생들이 주류를 이뤘고, 회장은 김병수가 맡았다. 당시 대회 자료를 보면, 박철희는 기술고문, 홍정표는 대회위원장을 맡아 약속대련과 격파, 가라테 형 및 장권형과 팔기권형 등을 연무했다.
강덕원은 다른 도장(관)보다는 대학교와 학자들이 많아 지식이나 학문을 갖춘 수련생들이 많아 도장 분위기가 달랐다. ‘인텔리(intelligentsia)’ 풍조가 있었던 것이다. 김병수의 후일담.
“수련은 평일 1시간 30분 정도 했어요. 어떨 때는 일요일에도 했죠. 박철희 사범은 주로 약속 대련과 형을 가르쳤어요. 대련은 발은 쓰지 않고 손만 사용하는 ‘손 대련’을 지도하고, 발과 손을 사용하는 기술은 유단자에게만 지도했죠. 대련을 할 때는 일절 컨텍(contact· 접촉)을 하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가라테 영향을 받은 ‘촌지방식(寸止方式)’이라고 할 수 있다. 1962년 대한태수도협회(大韓跆手道協會)가 경기규칙을 제정하기 이전에는 상대의 신체에 타격을 입히지 않고 목표 부위에 기술이 닿기 직전에 멈추는 수련 방식이 대세였다.
한편 박철희가 대한태수도협회 창립에 적극 참여하면서 김병수와 만날 기회가 줄어들었다. 이 시기 민간도장 사범들과 관장들은 평상시 도복보다는 넥타이를 맨 정장을 즐겨 입었다. 박철희도 이런 영향을 받았는지 협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도복보다는 정장차림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태껸 송덕기 옹과의 인연 이야기
1953년 휴전이 된 후 나의 외삼촌은 인민군 포로에서 석방되어 우리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잠시 살았다. 당시는 모두 가난한 시절이라 집집마다 하숙생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집이 많았다. 노인들이 ‘복덕방’을 통해 하숙을 찾는 사람들을 각 가정에 소개했는데, 김병수는 삼촌과 함께 다니던 노인을 만났다. 송덕기(1893년~198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76호 태껸 기능보유자)였다. 김병수의 후일담.
“이 분은 젊었을 때 태껸을 했고, 사직공원 위 인왕산 아래 황학정이라는 곳에서 활쏘기를 하면서 복덕방 일을 하면서 장기를 두곤 했어요. 가끔 나도 송덕기 영감과 종로 체부동 골목을 거닐곤 했는데, 어느 날 내게 골목길에서 ‘한판 놀자’고 하길래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이지 으아 했어요. 내게 ‘공수도는 곧은 발길질을 하지만 태껸은 느름질을 한다면서 발바닥으로 나를 밀치더니 태껸을 해보자고 하면서 대련자세를 취했어요. 양손은 아래로 늘러 뜨린 채 흥청흥청 리듬을 타면서 놀자고 하시길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죠. 공수도는 형(型), 즉 품세(品勢)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단계적으로 배우겠지만 태껸은 형도 없고 그냥 놀자고 하니 도무지 배울 수가 없었지요. 태견은 형 없이 놀이 동작을 하면서 발로 밀어 상대를 넘어뜨리는 놀이로 보였습니다. 영감님은 태껸을 동내 패(그룹)끼리 5월 단오 때 했다고 했어요. 처녀들은 널뛰기와 그네를 타고, 총각들은 돌팔매질과 태껸 놀이를 했다면서요.”
1956년 경무대 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홍희가 청도관 유단자 중심으로 육군당수도시범단을 만들어 연무시범을 했다. 송덕기는 1958년 이승만 탄신기념 무술시범에서 제자와 함께 태껸을 시연했다.
이 같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김병수는 태껸과 얽힌 태권도(跆拳道) 명칭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태껸은 한자(漢字)가 없습니다. 그래서 택견, 탁견, 태껸 여러 가지로 썼는데, 군인(최홍희)의 머리로 아무리 한자 옥편 사전을 찾아도 이승만 대통령이 말한 태껸이 없었지요. 그래서 궁리 끝에 태는 ‘밟을 태(跆)’, 견은 주먹 권(拳)으로 비슷한 글자를 찾아서 ‘태권’이라고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도 한참 찾았어요. 조선 말기 매화선인의 시집에서 탁견, 즉 탁(탁구 치기)과 견(어깨)이라는 한자를 처음 발견해서 쾌재를 불렀죠. 하지만 무술의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군대에서 싸움을 위한 병술(兵術)로 볼 수 있지만 무술과 병술은 별개라고 봅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962년 초겨울, 김병수는 박철희 초청으로 송덕기(宋德基·국가무형문화재 제76호 태껸 기능보유자)를 만나 태껸을 촬영하기로 초대 받았다. 하지만 대학교 학사고시와 겹쳐 가지 못하고 대신 라종남이 갔다.
김병수가 송덕기와 함께 촬영한 태껸 사진은 1963년 그가 미국 Black Belt 잡지 통신원으로 있을 때 한 것이다. 그는 “한국 태권도 역사에 대해 자문을 요청해서 송덕기 옹을 모시고 경회루에서 태껸 동작을 찍어 태권도와 연결 고리를 만들려는 의도로 촬영한 것이다. 당시 한국에선 택견 부활 운동은 일체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태껸을 태권도의 원류로 연관 지으려는 노력은 1970년대 초부터 전개됐다. 대한태권도협회가 출간한 『태권도』(1971년 11월호)에 이훈석이 기고한 ‘살아 있는 태견인 송덕기 옹’의 글을 보자.
“(…) 태권도가 진정 우리의 것이라고 자랑할 수 있기에는 역사적 근거와 그를 뒷받침할 증거가 마땅히 있어야만 한다 (…) 태권도인은 누구나 송덕기 옹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는 동시에 우리 태권도 발전에 도움이 되고, 또한 우리 태권도 역사 정리에도 보탬이 될 수 있는 지료를 애써 찾는 자세 (…)”
이 글은 “이와 같은 인물이나 자료를 발견했을 경우, 지체 없이 대한태권도협회에 연락해 줄 것을 바란다”고 마무리 한 것을 보면, 대한태권도협회 차원에서 태껸을 태권도의 원류로 인식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병수는 송덕기와 계속 좋은 인연을 이어갔다.
“그 분이 사직동, 필운동, 체부동 등에서 오래 살아 자주 만나 인사를 하고 지냈습니다. 미국에 온 후 1972년부터 1983년가지 한국에 갈 때마다 미국 학생들을 데리고 인왕산과 황학정으로 인사하러 갔지요. 그 분과 오랫동안 ‘Frendship’을 유지했는데, 1987년 세상을 하직하셨어요. 그 분이 생존할 때는 지금처럼 태껸이 빛을 보지 못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