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9월이다.
9월 4일이 되면 태권도 제도권을 중심으로 ‘태권도의 날’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1973년부터 정부가 법률로 정한 법정기념일은 부부의 날, 사회복지의 날, 의병의 날, 농업인의 날, 과학의 날, 지식재산의 날 등 총 70여 개가 있다. 이 속에 ‘태권도의 날’도 있다.
#각 계 법정기념일 사례와 의미
각 계의 법정기념일은 왜 ‘그 날’로 정해졌을까.
‘약의 날’은 우리나라에서 약사법이 제정된 1953년 11월 18일을 법정기념일로 삼았고, 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일깨워 애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제정한 ‘의병의 날’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6월 1일로 정했다.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은 5월 11일이다. 기념일 제정을 놓고 동학 관련 단체와 지역 간에 갈등이 일자 문화체육관광부는 기념일 선정위원회를 구성한 후 공청회 등을 거쳐 역사성·상징성·지역참여도 등 선정기준에 따라 기념일 적합성을 심의해,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황토현 일대에서 최초로 전투를 벌여 승리한 황토현 전승일(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로 정했다.
이와 함께 2013년 제정된 ‘부부의 날’은 가정의 달인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서해에서 일어난 북한의 도발로 희생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제정된 ‘서해 수호의 날’은 천안함 피격사건이 일어난 3월 26일을 기념일로 정했다.
지난 4월에는 국회의원들과 노동자 단체가 세계 산업재해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4월 28일)에 맞춰 ‘산재노동자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하기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 9월 4일 태권도의 날 제정 과정
그렇다면 9월 4일 ‘태권도의 날’은 무슨 의미와 어떤 과정을 거쳐 법정기념일로 제정된 것일까? 촘촘히 살펴보자.
(1) 1994년 9월 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03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2) 2006년 7월 25일, 세계태권도연맹(WT)은 베트남에서 열린 정기총회에서 9월 4일을 ‘태권도의 날’로 지정했다.
(3) 2006년 9월 4일, 세계태권도연맹이 서울에서 개최한 제1회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개막식에서 ‘태권도의 날’을 선포했다.
(4) 2008년 6월, 『태권도진흥 및 태권도공원 조성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되자 9월 4일을 태권도의 날로 제정하고 법정기념일로 삼았다.
그 해 9월 4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국기원·세계태권도연맹·대한태권도협회·태권도진흥재단이 공동 주관한 첫 태권도의 날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올해는 지난해에 이어 코로나19 여파로 대규모 기념행사를 취소하고 ‘태권도 우리 모두 챔피언’(슬로건) 영상을 온라인을 통해 공유했다.
# ‘9월 4일=태권도의 날’ 이의 제기
여기서 따진다.
첫째, ‘9월 4일=태권도의 날’은 보편타당한 당위성과 명분을 갖고 있는가? 9월 4일(태권도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일)이 태권도의 가치와 의미 및 상징성과 정체성, 대표성을 담아내고 있는가?
둘째, 올림픽과 밀접한 태권도 스포츠 경기단체인 세계태권도연맹이 9월 4일을 ‘태권도의 날’로 지정했다고 해서, 그것이 무예(무도)와 생활체육 태권도를 한데 아우른 태권도계의 의지와 정서를 얼마나 포용·포괄하고 있는가?
셋째, 정부가 『태권도진흥 및 태권도공원 조성 등에 관한 법률』을 토대로 9월 4일을 ‘태권도의 날’로 제정한 과정과 절차는 투명하고 객관적인가? 대다수 태권도인들이 모르는 상황에서, 의견 수렴과 공청회도 없이 섣부르게 제정·발표한 것이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가?
넷째, 세계태권도연맹이 지정하고, 우리나라가 제정·발표했다고 해서 반론과 이의 제기도 하지 않고 9월 4일을 ‘태권도의 날’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단언컨대, ‘태권도의 날’은 다시 정해야 한다. 명분과 당위성이 미약하고 태권도계의 폭넓은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못한 ‘9월 4일=태권도의 날’은 폐기해야 한다.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9월 4일은 두말할 것 없이 태권도계에선 경사스러운 날이다. 하지만 좀 거칠게 말해, 9월 4일은 올림픽과 직결되어 있는 ‘세계태권도연맹의 날’이 될 수 있어도 ‘태권도의 날’이라고 확대하는 건 옳지 않다. 과유불급이다.
# ‘태권도의 날’ 다시 정해야 하는 까닭
그래서 제안한다. 대다수 태권도인들이 동의하고, 태권도의 가치와 의미 및 상징성과 정체성, 대표성을 최대한 아우른 날을 ‘태권도의 날’로 다시 정하자.
(1) 태권도 명칭 제정일 4월 11일(1955년)
(2) 태권도 명칭 공식 의결일 8월 5일(1965년)
(3) 태권도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일 9월 4일(1994년)
(4) 태권도 국기(國技) 제정일 3월 30일(2018년)
위 네 가지 날짜(일) 중 <태권도의 날 선정위원회>를 구성해 선정기준을 마련하고 공청회 등을 거쳐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태권도의 날’을 다시 정하면 어떨까. 물론 태권도 명칭 제정일을 두고 4월 11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논란이 있지만, 이것은 역사전문가들에게 맡기면 쉽게 해결될 것이다.
세계태권도연맹이 지정하고, 정부가 제정했다고 해서 ‘9월 4일=태권도의 날’이라는 정당성을 획득할 순 없다. 시쳇말로 자기들이 맘대로 정해 놓고 따르라고 하는 기념일이 얼마나 충성도와 생명력이 있겠는가.
‘태권도의 날’은 다시 정해야 한다. 그래야 태권도인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을 수 있다.